한국인에 최적화된 췌장암 진료지침이 개발된다.

국립암센터는 과학적인 근거와 국내 치료 환경을 바탕으로 한 한국판 췌장암 가이드라인 제작에 돌입했다.

이번 췌장암 가이드라인은 소화기내과와 외과, 종양내과, 방사선종양학과, 핵의학과, 병리학과, 영상의학과 등 췌장암 진단부터 치료까지의 과정에 관여하는 모든 분과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다학제 진료지침으로, 췌장암 분야에서는 국내 최초의 가이드라인이다.

본지는 종양내과분과 대표로 가이드라인 제작에 참여한 서울성모병원 이명아 교수를 만나 췌장암 진료지침 발행 목적과 진행 경과에 대해 들어봤다.

서울성모병원 종양내과 이명아 교수
서울성모병원 종양내과 이명아 교수

췌장암, '포기' 아닌 '치료 가능'한 질환

췌장암은 환자 대다수가 고령으로 진단 시기도 늦을 뿐 아니라 신약의 부재, 낮은 약물 반응률 등으로 발병률과 사망률에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예후가 좋지 않았다.

환자의 진단 측면에서도 병기 분류를 1~4기로 나눈 타 암종들과 달리 췌장암은 수술이 가능한 환자와 불가능한 환자로 구분지어 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이드라인으로 내세울 수 있는 진단이나 치료법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상황.

이명아 교수는 "가이드라인이라는 것은 '표준 진료지침'으로, 각각의 병기에 적합한 치료법을 권고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췌장암은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약제 종류가 자체가 적고, 치료 결과를 보기 위해 진행한 대부분의 임상마저 실패해 사실상 가이드라인이라고 내세울 만한 내용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췌장암에 대한 진료지침은 미국 종합암네트워크(NCCN)와 미국임상종양학회(ASCO), 유럽종양학회(ESMO) 등 일부 글로벌 가이드라인에만 존재했을 뿐, 국내에서의 발행은 전무했다.

하지만 최근 신약들의 등장과 치료 기술의 향상, 다학제 진료 등으로 인해 췌장암 치료 방법이 다양해지고, 치료 성적이 점차 향상되면서 가이드라인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고.

이 교수는 "췌장암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최근 5~6년간 치료 성적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예후가 좋지 않았던 과거의 치료 방법을 적용하는 의료진도 적지 않다"며 "이에 효율적인 치료법들을 공유하고, 적극적인 치료를 독려하기 위해 가이드라인을 제작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어 "가이드라인을 통해 환자를 가장 먼저 접하는 1차 진료 의료진들에게도 췌장암이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것"이라며 "무엇보다 다학제적 접근을 통해 생존기간 연장과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해, 환자들이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할 수 있도록 인식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서양 위주 지침 아닌 한국인에 맞게 최적화

한국판 췌장암 가이드라인은 글로벌 기준이 아닌 국내 치료 환경에 적합한 지침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명아 교수는 "글로벌 가이드라인은 철저하게 검증된 임상 결과만을 권장하고 있다"며 "하지만 각 국가마다 급여 체계나 문화적인 차이가 달라 동일한 가이드라인을 적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전했다.

이는, 근거가 충분한 치료법이나 검사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부 정책에 따라 사용 여부가 갈릴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례로 CT나 내시경 촬영의 경우 국내에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손쉽게 진행이 가능하지만, 해외에서는 검사 과정이 복잡하고 가격이 비싸 재발률이 높은 시기라도 1년에 한번 가량만 권고하고 있다고.

이 교수는 "한국판 가이드라인은 과학적인 근거 측면에서는 글로벌 가이드라인과 유사하지만, 여기에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과 현실적으로 필요한 부분들을 검토하여 반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급여 기준을 가지고 가이드라인을 만든다면 심평원이 제시하는 급여 가이드라인과 다를 바가 없는 만큼 급여의 적용 여부만을 가지고 권고의 등급을 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학회가 해야할 일은 당장 사용이 어려운 진단법이나 치료법이라고 하더라도 과학적인 근거가 명확하다면, 가이드라인의 권고 수준을 통해 추후 급여 적용을 요청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근거 중심의 '다학제 진료지침' 세워

이번 가이드라인의 가장 큰 특징은 췌장암에 관련된 모든 분과가 공동으로 참여해 집필하는 다학제 진료 지침이라는 점이다.

그간 국내에서 발행된 가이드라인의 대다수가 일부 분과의 주도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상황.

이 교수는 "기존의 가이드라인들은 주로 특정 학회나 분과에서 만든 후, 타 과의 내용은 자문 형태로 추가하는 형식으로 제작되어 왔다"며 "국내 췌장암 가이드라인은 처음 기획 단계에서부터 췌장암에 관련된 각 분과를 대표하는 의료진들이 모여 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가이드라인 제작 초기 단계에서 진단부터 각 병기별 치료 전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모두 아우르는 일종의 교과서와 같은 표준 지침으로 제작하겠다는 의미다.

그는 "췌장암은 환자의 진단 단계에서부터 팀 단위로 다학제적 접근이 이뤄지고 있어 진료 지침에도 이런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며 "이에 병기별로 분과들과의 협진을 통해 어떠한 치료를 결정할 지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가이드라인을 구성하고 있다"고 전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이드라인에 포함되는 각 근거들의 수준을 엄격히 해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고. 가이드라인 위원들은 논문 수준을 개별항목별로 평가하는가 하면, 근거가 되는 참고 문헌 수준까지 세세하게 평가하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 지침을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그저 그간의 경험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근거를 토대로 정형화된 도구들을 이용하여 가이드라인을 제작하고 있다"며 "의료진들에게 제대로된 의미를 전달하고 이를 제도에도 반영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검증된 내용들을 담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이드라인은 향후 의학회로부터 인증을 받는 절차까지 거칠 계획이다. 의학회의 가이드라인 인증은 지침 내용에 대해 세부적인 수준까지 얼마나 높은 수준의 근거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는지를 입증해야 할 정도로 까다롭게 진행된다. 최근에 위암 가이드라인도 인증 획득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바 있다.

이 교수는 "제대로 된 다학제 진료가 이뤄질려면 각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한국판 췌장암 가이드라인은 이러한 사안들을 모두 고려하여 제작하고 있는 만큼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명아 교수는 췌장암을 비롯한 다양한 암 환자들이 보다 나은 치료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종양내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종양내과는 단순하게 약물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분과가 아니라 각 환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가장 효율적인 약물 치료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는 항암치료 전문 직역"이라며 "다른 분과에서도 항암제를 사용할 수 있지만, 각각의 약물을 가지고 환자의 상태에 맞춰 적용하는 일은 각 분과 중에서도 종양내과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자신했다.

이어 "약물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 등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만, 항암제는 치료 효과만큼 독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환자 맞춤형으로 조절하여 사용할 수 있는 전문가의 의견이 중요하다"며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어떻게 조리하느냐에 따라 고급 요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같은 항암제를 쓰더라도 독성을 최대한 줄이면서 최대의 효과를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전문가가 해야할 일이고 종양내과가 해야할 일"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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