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질’에서 ‘뇌전증’으로 질환명이 바뀐지도 6년이 지났지만 뇌전증 환자들은 여전히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고 있다.

대한뇌전증학회가 회장제에서 이사장제로 바뀐 후 처음 이사장을 맡은 김재문 교수(충남대병원 신경과)는, 뇌전증 환자들이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법적 체계를 만드는데 가장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뇌전증 환자의 정당한 직장생활 위해 역학조사 등 진행

“뇌전증 환자들은 직업현장에서 이유 없이 퇴사조치 당해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뇌전증 환자들이 정정당당하게 운전하고, 부당하게 해고 되지 않도록 법적 체계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자 합니다.”

세계뇌전증학회에서는 학술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편견 퇴치도 중요한 사업으로 여긴다. 이에 김 이사장도 뇌전증의 사회적 인식 개선과 처우 개선에 가장 주력하겠다는 것.

“뇌전증 환자는 직장에서 퇴사를 권유하면 마음의 짐 때문에 대부분 스스로 나온다”며 “실제 난치성 뇌전증 환자들은 대부분 의료보호 1종이라 산정특례가 가능해도 혜택을 받을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으며, 취업에서도 많은 불이익까지 받고 있는 것”이라고 실정을 전했다.

이같은 뇌전증 환자들의 사회적 불이익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뇌전증학회 사회위원회에서는 금년 생명보험회사와 논의해 일부의 뇌전증 환자들이라도 사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보험상품을 만들기도 했다.

이에 더하여 뇌전증 환자들이 정당하게 직장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뇌전증 환자들의 경제적 상태 역학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물론 학술적인 면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현재 대형병원들 위주의 뇌전증 연구를 지방, 중소병원까지 확대하기 위해 전국단위의 공동연구를 진행하겠다는 것. 그는 “대한두통학회장 시절 가장 성공한 것이 공동연구 시스템”이라며 “그동안 부족했던 기초연구에 집중해서 연구비 지원을 통해 전국단위의 공동연구를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 것”이라고 전했다.

김 이사장이 또 한 가지 야심차게 추진하는 사업은 능력 있는 신규 의사들이 ‘뇌전증’이라는 질환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공의들이 전문의 시험을 본 후 1, 2월 남는 시간에 2박3일 정도 뇌전증을 리뷰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해 질환에 관심을 갖게 하겠다는 것.

실제로 뇌전증은 매우 깊이 있고 매력 있는 학문이라고 강조하는 김 이사장. “80년대에는  뇌의 많은 부분을 뇌전증을 통해 알게 되었을 정도로 뇌전증 연구가 매우 활발했다”며 “경험 많은 선배들이 뇌를 이해하는데 있어 뇌전증 연구의 중요함을 알려 젊은 의사들에게 사명감을 갖게 하고자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이라고 전했다. 

 

뇌전증 환자 ‘100명 중 77명’은 사회생활 문제없어

뇌전증학회는 뇌전증 환자들의 사회적 낙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랜 시간 노력해왔다. 이러한 일환으로 기존 ‘간질’로 불리던 질환명을 '뇌전증(epilepsy)'으로 변경한 지도 약 6년이 지났다. 그러나 학회 조사결과 이러한 노력에도 일반인들의 뇌전증 인지도는 여전히 낮은 상태다. 학회가 지난해 일반인 357명을 대상으로 인지도 조사를 진행한 결과, ‘뇌전증’이란 병명을 들어본 적 있다고 응답한 이들은 36%였고 어떤 병인지 알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20%에 불과했다.

김 이사장은 “뇌전증은 유전병이 아니라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며 “노인인구가 많아지면서 계속 늘어나는 추세인데, 이는 노화에 의해 뇌 조절 기능이 떨어지는 것이 원인으로 이 때문에 치매나 파킨슨병에서 일부 뇌전증을 동반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뇌전증은 불치병이 아니라 비교적 치료가 잘 되는 병이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100명의 뇌전증 환자 중 50명은 약물로 좋아져서 약을 끊고, 20명은 재발하지만 약을 먹는 동안은 발작을 안 한다. 그러므로 70명은 발작에서 자유로운 것. 또 나머지 30명 중 15명 정도는 현재 치료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 되지만, 나머지 15명은 수술적 방법을 통해 7명 정도는 좋아진다. 결과적으로 “치료가 되거나 발작을 조절할 수 있는 77명은 사회가 따뜻하게 보듬어야 한다”며 “또한 치료가 안 되는 일부 환자들도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분명히 좋아지므로 환자, 가족, 의료진이 어우르면서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안아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뇌전증 치료제는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약물이 4~5가지에 불과했고 환자 모두에게 똑같이 사용됐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면서 약물이 다양화 되어 지금은 20가지 이상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에 더해 최근에는 약물 맞춤형 시대가 도래했다. “뇌전증은 아기가 열이 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원인이 여러 가지이므로 그 원인마다 다른 약을 쓴다”며 “특히 각 기전마다 작용 하는 약들이 현재 다 나와 있을 정도라 맞춤 약물치료가 가능하다”고. 이어 “수술도 뇌절제술 이외 신경 모듈레이션, 심부 자극술, 미주신경 자극술 등의 임상 데이터들도 증상을 지속적으로 호전시키는 것으로 나오고 있어서 치료 전망은 더욱 밝다”고 덧붙였다. 

 

뇌전증전문지원센터 개설 시급…로드맵 만든다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정부에서 뇌전증 검사와 수술을 지원해주는 뇌전증전문지원센터 개설이 시급합니다. 이를 위해 학회에서는 이러한 제도의 로드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뇌자도, 삼차원뇌파수술 로봇 장비, 레이저내시경 수술장비 등 뇌전증 수술에 필요한 장비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국립병원 한 두 곳을 정해서 적자를 감수하고 수술센터를 만드는 것도 어려운 현실. 이에 우선 첨단 검사 장비를 갖춘 지원센터를 개설해 각 병원에서 환자를 의뢰하면 최신 검사에 대한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검사를 지원하는 센터를 개설하고자 하는 것.

이를 위해 올해 신설한 뇌전증편견대책위원회장을 맡은 홍승봉 前 뇌전증학회장을 필두로 경험 많은 교수들이 센터 설립을 위한 로드맵을 만들고 있다.  
     
또 개원가의 뇌전증 치료 환경 조성에도 나선다. 현재 신경과 개원가에서는 수익이 되지 않다보니 뇌전증을 진료할 수 있는 뇌파장비를 들여놓지 않는다. 따라서 꼭 대학병원에 오지 않고 약만 처방받아도 될 환자들이 갈 곳이 없는 것. 이에 학회는 개원의 대상 가이드라인을 만들 예정이다. “진단부터, 여러 증후군, 원인 질환 등을 안내하고 이에 따른 약물 치료와 2차 병원에 이송하는 과정을 담을 것”이라며 “적어도 신경과 개원의가 2~30명 정도의 뇌전증 환자를 진료하면 손해를 보지 않도록 가이드하는 내용을 담아 환자들도 편히 동네 신경과나 소아신경과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 할 것”이라고 전했다.

암환자보다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뇌전증 환자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편견을 없애고, 사회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백방으로 나서는 김 이사장의 행보가 환자들의 마음까지 보듬는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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